식민권력의 모태인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민중동원 및 사상통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신사를 종교에서 제외하여(‘신사 비종교화’) 일찍
부터 초종교적 위치에 두고 있었다. 식민권력도 메이지 정부의 경험
을 바탕으로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직후부터 신사를 중심으로 한 정
책을 꾸준하게 진행시켰고, 그 결과 1925년 天照大神을 제사하는 조
선신궁이 남산에 세워졌다.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조선신궁은
식민권력이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일제하 식
민권력은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종교’와 ‘유사종교’를 분리하고 민족
종교들을 유사종교에 포함시켜 경찰의 통제를 받도록 감독하면서 단
속 기관도 분리하였다. 이러한 분리통제와 더불어 민족종교는 사이
비 종교로 간주되었고, 식민권력은 철저한 통제, 탄압과 심지어 박멸
까지 획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인종교 정책을 실시하여 유사종교
인 민족종교는 교단화가 억제되었고, 또 공인종교로 설립되더라도
식민권력의 의도에 반하거나 혹은 부정할 경우 전방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식민권력의 이러한 종교정책의 주요한 대상 중 하
나가 보천교였다. 보천교는 교세가 확대되면서 식민권력의 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교단 공개와 함께 노출된 조직은 공인된 종교
단체로 인정받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유사종교’의 대표격으로 만들어
졌다. 결국 보천교는 자구책으로 비민족적인 성향까지 감수하며 교
단의 이미지를 바꾸려 했지만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듯
민족종교 보천교의 운명은 식민권력의 ‘비종교’,‘종교’정책과 동화정
책을 성공시키기 위한 통제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