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문화 제30권>
국권회복 이후 개천절 봉축행사는 국내 단군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었 다. 이를 먼저 담당한 세력은 대종교인 안재홍의 국민당이었다. 국민당은 1945년 10월 3일에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고 단기 사용과 개천절 홍보를 결의하였다. 1945년 개천절 행사는 특히 대종교인들이 중심된 단군전봉건회의 출발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단군전봉건회는 대종교⋅조선국술협회와 함께 1945년 개천절 행사를 열었다. 이는 대종교인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주도하였 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개천절이 3.1절⋅광복절⋅한글날⋅예수성탄절과 더불어 일요일로 정해졌다. 이는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지는 배경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개천절은 사상적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장이었 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46년의 개천절 행사의 특징은 전년과 달리 기독교 등 종교단체와 사회 단체로 구성된 ‘교화사업중앙협회’가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개천절이 대종교만의 행사가 아니라 이제 전민족적 행사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단군은 신이 아니다.”라는 발언은 1948년 개천절을 국경절로 정한 기반의 조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47년 개천절의 분위기는 국내외의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민족국 가 건립에 대한 열망으로 고조되어 갔다. 단군전봉건회의 활동이 두드러지 는 가운데, 채동선이 「개천가」를 작사하는 등 단군관련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개천절에 대한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무엇보다 1947년 개천절 의 특징은 관이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군정청 문교부는 적극적으로 개천절 행사에 각 학교⋅관공서⋅사회단체 등 직능별로 거의 ‘의무적’으로 참여하 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는 개천절이 완전히 한국사회에 정착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일항쟁기의 개천절이 민족의 단결과 정체성 확립 및 대일투쟁 의지를 고무시켰듯이, 해방공간의 개천절도 민족국가 건립과 남북통일 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