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문화 제29권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기억은 동이족 공동의 정체성이며 동이일가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요나라와 금나라도 고조선 역사기억을 계승하여 동이족이 일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동이족 국가들은 고유문화의 제천의식을 실 행하였는데 서로 유사하였다. 그런데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중 국의 호천상제를 수용하여 제천하였고 고유문화의 최고 신격과 공존시켰 다. 한족정권 북송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국가 제사에서 호천상제에 도교의 옥황대제를 더하여 신격을 향상 수정하였다. 고려시기에 단군의 신격과 고조선의 역사기억이 변화하였다. 고려 성종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유교의 국가제사를 수용하여 호천상제에 제사지냈다. 원종은 지배층의 요구를 받아들여 원나라의 압박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마니산에서 도교의 초제를 지내고 혈구사에서 밀교의 대일왕 법회를 열었다. 따라서 단군의 최고 신격이 잠시 홀대되었다. 그러나 단군 신격은 소멸된 것이 아니고 호천상제와 대일왕 등 최고 신격과 병존하였다고 본다. 고려 후기에는 오히려 단군의 신격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더욱 커졌다.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기억이 고려시기에 기록되었지만, 강화도의 마니산 과 혈구산 지명을 보면 고구려시기까지 기록을 소급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시기에 한정시켜 연구할 필요가 없다. 또한 고려와 조선 시기에는 고조선의 역사적 유적지를 고려와 조선의 판도 안에서 찾았으나 이런 태도는 북방정 권과 고려 사이에는 전략적 완충지역이 있었다는 외면한 것이다. 완충지역 에는 여전히 고려인과 조선인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판도 안에서 찾으려는 입장은 도선국사 양계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양계 론은 화이를 구별하는 화이론이었다. 그러나 동이족 일가 인식과 완충지역 의 존속에 근거하면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확대시켜서 연구하여야 한다. 거 란족의 목엽산 제천의식은 단군의 제천의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