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5년 [단전요의(檀典
要義)]가 간행되면서 부터이다. 항일전쟁기에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다. 1968년
최초로 규원사화를 번역 출간하여 연구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신학균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1970,80년대는 주로 번역서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 소장본(1946년)이 진본임을 1972년에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의 연구가 촉진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는 점에서 규원사화 연구사에 기록되어야 할 일대 사건이었다. 1977
년 송찬식 등의 위서 주장도 있었지만 규원사화 연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에는 규원사화 연구가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
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1980년 중반 이후
조인성을 필두로 ‘위서설’이 다시 등장하였고, 이에 이상시가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1990년 초반부터 박광용의 위서 주장
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이에 대해 임승국,정영훈 등이
적절하게 대응하였으며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
훈의 박사학위 논문과 심백섭의 석사학위 논문이 나오는 등 연구수
준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 무렵 정영훈은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내
놓았다. 그 연구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는 전 시대보다 정치,철학 등 다양한 측
면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연구의 다양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은 위서설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지만 상대적으로 규원사화가 진서라는 연구
성과와 인식의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이시기 시민단체와 학자들이 중국의 한국 상고사 왜곡에 대
한 대항이론을 규원사화에서 찾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식
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상고사 연구 방향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며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필사의 노력에 따른 결과이었다.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된 한국사는 더 이상 주류시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시기 남북이 규원사화를 매개로 상고사 인식을 공유
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2006년 남북학술대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북의 공동연구가 진척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특징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관
계자들이 적극 참여는 등연구자의 다양화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여러 방면에서 규원사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이전시기보
다 선사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대과제로 선교사관의 정립이라는 대과제 아
래 크게 대과제 소과제로 (1) 규원사화 속의 용어 대한 엄밀한 연구
(2) 한국사상사 상의 규원사화의 위치 확립을 위한 노력 (3) 규원사화
내용의 과학적인 논증방법 동원 (5)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로 연구의 확산 (6) 규원사화 관련 논문에서 위서설의 기술
은 이제 지양으로 압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