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논문의 역자(譯者)는 이미 2017년 8월에 발행된 『仙道文化』제23권
에서 영수사벽화묘와 관련된 두 편의 논문을 소개하였으며, 또한 그 글에
서 영수사벽화묘와 관련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논문을 이후의 기
회에 별도로 소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17) 이 3편의 논문은 모두 영수사
벽화묘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모두 고구려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어, 앞
으로 이 고분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다.
위에 소개한 1921년의 논문에서 그 저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는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해서 “그러한 점으로부터 생각해 보
면, 이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고구려설이 조금 더 온당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뿐이다.”라고 결론
짓고 있다. 연구와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고구려 벽화고분으로서 더
검토해보자는 취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는 1938년에 일생을 마감하
였고, 끝내 명백한 결론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한중
일 3국의 학계가 명확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금년 6월이면 영수사벽화묘가 정식으로 발굴된 지 100년이 된다. 그때
까지라도 그 벽화고분의 성격 특히 고분의 고구려 관련성은 분명하게 밝
혀져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이러한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서, 현재 요양(遼
陽) 일대의 한국 고대사 관련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연구가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양(遼陽)이 고대의 양평(襄平)이었다는, 그러므로 고구려
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이라는 일종의 ‘역사적 편견’을 깨는 계기도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18)
본고의 역자는 앞으로 다양하고 심층적인 방법으로 영수사벽화묘에 대
한 연구 및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역자의 연구능
력 부족 등으로 검토가 미진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바로
잡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