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청동기시대를 영위했던 사람들의 사유나 관념 체계와 관련된 제의 유적으 로서 환구유구나 환상열석이 고고학 조사에서 다수 발굴되었다. 환구유구는 환호라고도 불리는데, 환호는 기본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취락을 방어하기 위하여 시설된 도랑시설 형태로 조성된 유구인 반면, 환구은 취락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 방어시설이 아니라 어떤 취락의 자연지리적 환경 가운데 가장 신성한 지역으로 판단되는 지점에 소규모로 조성된 제의적 성격의 유적이다. 그리고 환상열석은 거석문화 가운데 하나로서 입석을 환형으로 배치한 것이며, 한국의 환상열석은 북한의 석광준에 의해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 리의 고인돌 발굴조사에서 돌돌림유적이 조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환구유구는 구리 토평동유적, 인천 영종도 는들유적, 인천 당하동유적, 인 천 원당동유적, 부천 고강동유적, 화성 쌍송리유적, 안성 반제리유적, 화성 정문리 유적, 평택 용이동 유적, 완주 구암리유적, 울산 연암동유적, 울산 창평동 유적 등 12곳에서 조사 되었고, 환상열석은 길주 문암리유적, 길주 평륙리유적, 평양 당모루유적, 연탄 송신동유 적, 철원 저탄리유적, 춘천 만천리유적, 양평 삼성리유적, 양평 신원리유적 등 8기이다. 한반도에서 조사된 환구유구 가운데 지리적으로 가장 북쪽에서 조사된 유적은 구리 토평 동 유적이며, 가장 남쪽에서 발굴된 유적은 울산시 창평동 유적이다. 환구유구는 지형상 구릉정상부에 조성되었으나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유적의 환구유구는 한강의 북안 충적 대지에서 조사되었다. 가장 북쪽에서 조사된 환상열석은 길주 문암리유적이며, 반면에 양평 신원리유적은 가장 남쪽에서 발굴된 사례이다. 환상열석도 춘천 만천리유적과 같이 구릉 정상부에 조성되었거나 또는 평양 당모루유적처럼 저지대 평야 경작지역에 축조되기도 한다.
환구유구와 환상열석의 구조적 차이점은 환구유구는 구상을 환형으로 조성하였으나 환상열석은 석재를 이용하여 환형으로 배치하였으며, 공통점은 환구유구와 환상열석 모 두 평면 형태는 환형 또는 타원형이며, 일부는 방형이나 장방형 등 방형계로도 조성되었 다. 구상의 단면 형태는 대체로 ‘U’자형이나 일부는 ‘W’자형으로 조성되었으며, 출입구 로 판단되는 구상 단절부가 양쪽에 대칭적으로 조사되었다. 환구유구의 내부에 수혈유구 와 주혈 등의 유구가 조성된 것이 있으며, 적석시설이나 자연암반 같은 구조물이 조사되기 도 하였다. 이들 구조물들은 규모나 유구의 형식에서 대체로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 다. 특히, 이중 굴광된 주혈이나 대목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한 지지석이 있는 주혈은 제의 활동과 관련된 입대목의 고고학적 유구로 파악된다.
환구유구의 가장 이른 시기는 인천 영종도 는들 유적이며, 가장 늦은 시기는 점토대토 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부천 고강동 유적이나 안성 반제리유적 등이며,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환상열석은 연탄 송신동유적에서 팽이형 토기가 출토되었고, 양평 신원리 유적에서 홍도편이 출토되었으며, 양평 삼성리 유적에서 는 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 따라서 환상열석은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 지 오랫동안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고고학적으로 주변지역과는 분명히 문화적 정체성이 다른 양상 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국의 신앙이나 예술 또는 의례 같은 인간 고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유적 가운데, 환상열석이나 환구유구 같은 사례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중국 중원 이나 일본과는 구조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다소 다른 발전과정을 밟아왔다. 이는 한민족은 토착적 환경에 물질문화가 적응되는 과정에서 관념이나 사고 체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례적 구조물이나 제의적 공간으로서 환구유구나 환상열석을 조영하여 왔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환구유구나 환상열석은 한국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선도문화』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