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라의 점복 관련 인물과 제도가 관제(官制)와 사원(寺院)에서 각각 어떻게 확인되는지를 살핀다. 신라의 점복 담당자는 무(巫)⋅일자(日者)⋅일관(日官)이라는 명 칭으로 문헌에 먼저 나타나며, 6세기 이후 관제의 정비, 불교의 수용, 당(唐)으로부터의 음양술수(陰陽術數) 전래와 함께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본고는 이를 관제 계통과 사원 계통으로 나누어 검토한다. 종래 관제 계통 연구는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다루지 않았 고, 점찰법회 연구는 관제의 점복 직능과 비교되지 않았다.
관제 계통에서 가장 이른 사례는 568년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의 점인(占人) 탁부 여난(与難) 대사(大舍)이다. 현행 교감판독에 따르면 이는 한국사에서 직명⋅실명⋅ 소속⋅관등을 갖춘 점복 담당자가 확인되는 현존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이다. 그 뒤로 삼국사기직관지의 공봉복사(供奉卜師), 749년에 설치된 천문박사(天文博 士), 8세기 후반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 김암(金巖)이 확인된다. 여난의 대사는 점인에 게만 주어진 관등이 아니며, 같은 명단의 집가인(執駕人)⋅이내종인(裏內從人)⋅약인 (藥人)에게도 보인다.
사원 계통에서는 원광(圓光)이 가서갑(嘉栖岬)에 설치한 것으로 전하는 점찰보(占察 寶), 일연이 그에 딸린 것으로 기록한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 「선도성모수희불사 (仙桃聖母隨喜佛事)」의 봄가을 정기 법회, 진표(眞表)에게서 영심(永深)으로 이어진 간자 (簡子)의 전승이 확인된다. 주목되는 것은 두 계통의 대비이다. 관제 계통에서는 직명과 관등이 확인되나 그 직무에 전속(專屬)된 재원은 확인되지 않고, 사원 계통에서는 전용 기금과 항규(恒規)에 따른 정기 설행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나 점복 관련 직명과 국가적 승인은 확인되지 않는다.
국가가 전문 지식을 관리한 방식은 준거가 된 문헌⋅점법의 지정, 교수⋅시험을 통한 숙달의 확인, 관직 편제와 인물의 임용이라는 세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당의 태복서(太卜署)⋅태사국(太史局), 일본의 음양료(陰陽寮)와 대조하면 신라에서는 관직의 설치와 인물의 임용이 확인된다. 당이 점복 기법의 통용 범위를 법으로 정하고 일본이 생도의 수학 연한과 역법의 시행을 영(令)과 식(式)으로 규정하던 시기에, 신라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인물에 대한 신임과 임용을 중심으로 한 승인의 모습이다. 같은 직관지가 국학⋅의학⋅산학에 대해서는 교수의 준거가 된 문헌을 적어 두었으므로, 점복⋅천문 영역에만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료의 결락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편 「선도성모수희불사」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근거한 점찰법회의 정례화를 선도산 신모의 권유와 시주에 결부하여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