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대관령 국사성황사가 동북아 선도제천의 전통을 이은 태백산 제천문화권이 라는 관점에서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구조와 신격을 살펴본 연구이다. 대관령은 강릉과 서울을 잇는 태백산맥의 관문으로 고대 이래로 강릉 일대의 사람들이 모여 제천하던 장소이기에 대관령 국사성황사만을 따로 떼어 연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필자는 한민 족의 제천산이며 대관령과 태백산맥의 한 줄기로 연결되어있는 태백산과의 비교를 통해서 대관령 국사성황사를 연구하는 것이 그 원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기 에 대관령 국사성황사를 ‘태백산 제천문화권’으로 규정하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태백산 제천단과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구조를 비교하여 두 곳의 동일성을 확인 하였다. 두 곳 모두 제천단-산신당-신사-우물의 동일한 구조를 보였으며 제의 절차나 일정 또한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물론 신사는 현재 두 곳 다 사라지고 태백산에 는 망경사가, 대관령에는 국사성황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과 정황으로 두 곳의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곳의 제천단 구조가 동일하다면 대관령 국사성황사가 태백산의 제천문화권임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태백산 제천단의 신격 변천 과정으로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신격을 살펴보았다. 태백산 제천단의 신격은 ‘일기⋅삼기’인 마고에서 삼성, 단군으로 변천되 었고 후에 산신이 추가되었으며 대관령 국사성황사는 ‘일기⋅삼기’인 칠성이었다가 후에 산신, 성황신으로 바뀌고 용왕신이 추가되어 지금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확인하였 다. 이는 태백산은 동북아 선도제천의 전통을 이어온 한민족의 중심 제천산으로 원형이 보존된 곳이기에 밝음을 회복한 선인 외에 다른 신격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대관령 국사성황사는 태백산 제천문화권에 속하는 다른 제천단처럼 기복신앙으로 바뀌면서 현존했던 위대한 인물을 산신이나 성황신으로 모시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관령이 태백산 제천문화권이라면 불교의 승려였던 범일국사가 어떻게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주신격이 될 수 있었는지를 그의 선가적 면모와 밝사상을 통해서 규명하였다. 그의 탄생설화에 ‘해(빛)’, ‘우물’, ‘바위’ 등의 밝사상이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 백달산(밝산)에서 수행한 점, 그리고 선도 비보사상을 주도한 사굴산문의 개창자라 는 점 등으로 범일국사가 삼국시대 후기 선도가 불교와 습합되는 과정에서 불교 승려의 모습으로 포장하였지만 실상은 동북아 선도제천의 전통을 잇는 선가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대관령 국사성황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국의 무천이라는 제천의례가 행하여지 던 장소라는 것도 잊히고 신격인 칠성이 생명에너지 ‘일기⋅삼기’라는 것도 잊힌 채 민속적 무속적인 이미지로 남아있지만, 동북아 선도제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태백 산과의 비교를 통해서 대관령 원형의 모습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B.C.7000년 전 흑수백산지구 소남산문화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동북아 선도제천문화는 비록 지금 은 그 의미가 잊혔지만 수많은 한반도의 제천산과 민속 문화 속에 흔적을 남겨두었기에 동북아 선도제천문화의 전통을 이은 태백산 제천단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그 원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대관령 국사성황사도 태백산 제천문화권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민속⋅무속이 아닌 선도제천의 시각으로 해석하니 하늘의 밝음과 자신 안의 밝음을 하나로 연결하여 밝음을 회복하고자 했던 선도제천문화였음을 알게 되었다.
『선도문화』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