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고려의 북방영토는 서북은 당(唐)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북상하였던 것”으로 기
록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국경 문제를 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인
동북9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북9성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함흥평야 일대설’, ‘길주 이남설’, ‘두만강 이북설’ 등
여러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직 학계내
에서 동북9성의 위치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첫째, ‘길주 이남설’은 조선시대의 ‘정통론’이란 소중화(小中華)의 입
장에서 서술된 것으로써,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마운령 정상에 존
재하는 ‘석추구기(石樞舊基)’가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윤관의 선춘령 정계비로 추정한 결과이다.
둘째, ‘함흥평야설’은 일제의 관학자들이 주장하였으며, 한반도와 만
주를 일제의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에 의한 결과물이다.
셋째, ‘두만강 이북설’은 조선초기 기록인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
지」·용비어천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들을 토대로
연구되어졌으며,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위치했었다고 서술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 이들 문헌자료들의 거리와 지명 등을 근거로 현지를 답
사하여 고증한 결과, 동북 9성 위치를 비정하는 주요 지명인 공험진과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조선초기에 두만강 이북에 있는 공험진 이남부
터는 조선의 관할 지역임을 주장하여 명으로부터 11처 지역의 여진 귀
속 문제를 승인 받았다. 이 사실들로 볼 때 조선 초기에는 공험진이 두
만강 이북에 있었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 아
래 명과의 외교 교섭을 벌여 두만강 이북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앞으로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하여, 동북9성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한국사 교과서에 명확하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또
한, 국경문제는 남북통일 이후 주변국과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 분명하므로, 먼저 우리 학계 내부에서 국경문제와 관련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나아가 국가 차원의 연구 지원사업을 통해서 동북9성
이 고려 및 조선초기에 두만강 이북 현재의 흑룡강성 수분하 일대 및 연
변 등 길림성 일대의 지역에 있었다는 인식을 전제로 현재의 연해주 일
대까지 국가의 강역으로 경략하려 했다는 논의를 분명하게 정립할 필요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