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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국학연구원 학술대회 기조강연문(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 12.13)

한국 선도 문헌은 위서가 아니다.

박 성 수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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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제왕운기와 삼국유사
3. 단재 신채호와 『조선상고사』
1) 後人 僞造의 天符經
2)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4. 북한의 상고사 연구
5.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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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申學均이 번역한 北崖의『규원사화』가 출판된 것은 1969년이었다. 이 책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한 마디로 냉담하였다. 그런 냉담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왜냐 하면 단군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에 대하여 까닭 없이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학과 출신 학자들이 예외 없이 단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차주환이나 이을호와 같은 철학자들은 거리낌 없이 단군과 선도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고 있다. 특히 얼마 전에 작고하신 차주환 교수는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이시다. 환웅의 신시가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란 말을 서슴없이 말하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사학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1976년 규원사화가 나온지 7년이나 지난 1976년에 당대 제1의 대가 네 분 (천관우 이기백 고병익 이우성)이 대담을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엿들을 수 있다.

千寬宇 『규원사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李基白 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 것을 보니 道家史學이라고 했어요. 揆園史話의 先驅的인 것(이맥의 진역유기를 말함 )이 고려 말에 있었나 봐요.
千寬宇 『규원사화』 말고 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 『단기고사』가 있다는데 읽어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 못 봤어요.
李佑成 『단기고사』는 이조 말에 만든 것 아닙니까. 『규원사화』라는 것도【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李基白 이런 것들이 단재가 말한 묘청이라든지 風水圖讖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요.
李佑成 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花郞 國仙 하는 仙, 단군도 선인의 후예라 했지만 그 선과 연결된 것 같아요. 그래서 道家가 아니라 仙家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 선가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긴 있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는 아니니까요.
李基白 지금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습니까.
李佑成 단군 이후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千寬宇 환웅 밑에 高矢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神誌가 만주를 다스리고 蚩尤가 하북 산동을 다스렸다는 건데요.
李佑成 『삼국유사』의 단군 기사와 『제왕운기』의 단군기사가 다른데 전자에서는 환웅이 곰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있어서는 환웅천황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연 이전까지는 중국과 동일한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주장하기에 바빴는데 고려중엽부터는 중국과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우리조상의 역사가 출발했다는 것을 내세우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요컨대 처음부터 단군을 신화로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단군을 민족시조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인용이 좀 길었지만 1한 마디로 말해서 1970년대의 대표적인 사학자들 가운데 『규원사화』를 읽어 본 사람이 단 한 사람 이우성 교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백은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고 천관우씨는 바빠서 읽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단 한 사람 이우성 교수는 『규원사화』를 도가사서 운운한 한영우의 논문을 비판하면서 그것은 도교가 아니라 선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우성은 사학전공이 아니라 한문학을 공부한 한학자였기 때문에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와 중국의 도교와 우리나라의 선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이나 문학을 하는 분들은 단군연구를 기피하지 않는데 유독 국사학자들안 단군 연구를 기피하고 도교와 선도를 분별하지 못하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 제왕운기와 사국유사

陽村 權近(1352-1409)의 글을 읽어 보면 김부식의『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이 혹독하다. 『삼국사기』 비판이. 결코 근대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권근에 의하면 김부식이 이전에 있던 『原三國史』의 기록을 오려서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삼국으로 나누어 재편집한 것으로 탈락된 것이 많다는 것이었고 거기다 부여와 가야의 기록을 버리고 『오국사』를 억지로 『삼국의 역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사마천의『사기』를 모방하여 『원삼국사』를 셋으로 나누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는데 기록한 것도 있으나 빠뜨린 것이 많아 참고하기 매우 어렵다.

권근은 또 유명한 應製詩註 “상고시대 개벽한 동이왕“에서 단군조선에 관해 언급하였다.

옛날 神人이 단목 아래 내려오시어 나라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이라 불렀다. 때는 당요 원년 무진이었다. 전한 세대를 따지면 몇 대인지 알기 어려우나 해로 따지면 천년이 넘었다네.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생각하건데 우리 해동에 나라가 있었으니 단군이 자력으로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그때는 까마득한 옛날이라 민속이 순박하였다네.(惟我海東之有國也 肇自檀君朝鮮 時方鴻荒 民俗淳朴)

권근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중국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방에 우리나라가 있었다. 단군이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나라를 세웠다. 다른 하나는 단군이 세운 나라에 도적이 없었다. 그 풍습이 순박하였다. 우리 동방에는 중국과 다른 우리 독자의 나라가 있었는데 중국같이 시끄러운 나라가 아니라 서로 싸우지 않고 상부상조하는 행복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권근이 단군의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나라가 매우 행복한 理想國家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 서술의 전통은 『세종실론』 지리지, 서거정의 『동국통감』, 노사신의 『삼국사절요』 그리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만운의 『기년아람』 등으로 이어졌으며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서술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식의 고기는 단연코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 단군을 실재 역사인물로 보았고 그것이 한말의 국사교과서 그리고 단재의 상고사 연구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같이 단군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전통이 되었을까. 고려시대의 또 하나의 사서로서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있는데 바로 여기에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가들은 단군조선과 그 가르침을 기술할 때 일연의 삼국유사보다도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승휴는『제왕운기』에서 <本紀>를 인용하면서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온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라 하였으나 제왕운기에서는 <본기>라 하였고 또 중요한 차이는 단군을 낳은 어머니를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라 하지 않고 환웅(釋帝)의 孫女라 하였다.
두 기록의 차이는 엄청나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웅녀와 야합하여 단군을 낳았으니 매우 부도덕한 결합이었다. 그러나 『제왕운기』는 환웅의 손녀 즉 신의 손녀와 지상의 檀樹神과 신성하게 결합하여 단군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단군은웅녀가 낳릉 獸人의 자식이 아니라 神女가 낳은 아들 神人인 것이다. 해석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환웅은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다음 단수신과 혼인하여 남자 아이를 낳으니 곧 단군이었으며 조선 땅을 차지하여 임금이 되었다. (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이승휴는 단군의 단자를 제단 壇자를 쓰지 않고 박달나무 檀자를 썼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남북옥조 동북부여 그리고 예맥 등이 모두 단군의 손이라 하였다. 단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조선시대 500년에 걸쳐 일연의 <고기설>보다 이승휴의 <본기설>이 단연 우세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서는 일제가 일연의 삼국사기만 거론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거론하지 않아 자연 학계가 그에 따르게 된 것이다.
세조 예종 성종 년간에 여러 차례 전국에 押收令을 내려 걷어간 秘書들은 모두 이 같은 국정해석을 어긴 불온서적이었고 그 일부가 조선왕조 말기 즉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진역유기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의 책으로 공개된 것이다.

3. 단재 신채호와 『조선상고사』

일제가 조선총독부 안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단군 말살 정책에 착수한 사실은 이미 다 아는 상식인데 단군 말살정책의 하수인은 이마니시(今西龍)란 학ㅈ다였다. 그는 단군을 조선사에서 제외하는데 이른바 전통적인 편년사 서술과 실증주의를 활용하였다.

조선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외에 전해진 무 문헌사료가 없기 때문에 조선인 스스로가 상고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지내 온 것이다. 자기 문헌이 없는 탓에 중국의 사서를 읽고 나서야 겨우 삼국 이전의 사실을 안 것이다. 만일 중국사서가 없었다면 삼국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조 기록을 “史實이 아니라 史說이다” 고 하면서 조선사에 넣을 수 없다고 잡아 땠다. 조선사편수위원으로 발탁된 최남선 등 조선인 학자들은 금서룡의 이 말 한마디에 상고사와 단군 그리고 선도를 다 잃고 말았던 것이다. 단군 되찾기는 당시 재야사학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는 단군을 비롯한 2000년 상고사를 역사에서 제외하는데 있어서 유일한 사서 삼국유사를「사설」이라고 하는 말 한마디 이외에 아무런 말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시다 시피 단재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하나를 필사하여 망명길을 떠난 역사가로 일제의 단군말살 정책에 항거한 유일한 민족사학자였다. 단재는 중국으로 망명하기에 직전인 1910년 3월 『대한매일신보』에 「東國古代仙敎考」라는 아주 짧은 그러나 아주 중요한 글을 남기고 조국을 떠났다. 망국의 서러움에 울던 당시의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단재는 우리나라에 우리 민족 고유의 선교문화가 있었다고 주창하였고 이 선도의 광복이야 나라의 광복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단재는 또 우리나라에 중국보다 일찍이 선교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나라가 다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단재는 말하기를 “중국의 노자가 단군보다 1천 수 백년이나 후대의 사람이라 우리 단군을 天仙이라 우러러 보았으며『삼국사기』에도 단군을 선인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우리 고유의 仙敎가 있었고 그 교의가 중국의 도교와 매우 달랐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선교는 환인 환웅 단군 등 삼신을 모셨고 事君以忠 事父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과 같은 독특한 敎義를 가르쳤다. 혼자서 산에 들어가 입산수도하는 따위의 중국식의 신선도와 다르다고 한 것이다. 만일 삼국 이전에 고조선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고유의 선도문화가 없었고 외래삼교를 포함한 우리 고유의 선도를 기록한 선사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1) 後人 僞造의 天符經
이런 사람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라고 주장할 리 없었는데 단재가 이화사의 단기고사에 서문이 위작이며 그밖에 『천부경』과 『삼일신고』도 모두 위서라 하였다는 위서론이 나와 흔히 단재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위서론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큰 잘못이다.
선도문헌 위서론자들은 단재가 일제치하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연재한『朝鮮史硏究草』와 『朝鮮上古文化史』에서 두 번이나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라고 주장하였다는 논문을 실어 국사학자 거개가 그런 줄로 알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의 한 사람인 조인성은 『朝鮮史硏究草』에 나오는 한 구절을 가지고 단재를 천부경 위서론자라 주장하였다.

역사를 연구하려면 史的 材料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자라. 10만 권의 藏書樓 속에서 坐臥할지라도 서적의 眞僞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後人 僞造의 天符經 등도 단군왕검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 歷來의 朝鮮史家들의 소위 사학은 매양 博學으로써 유일한 조건을 삼으며 그 소위 박학은 오직 서적뿐이요 그 소위 서적은 중국서적뿐이다.

단재의 이 글은 1924년 10월 24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아일보』 지상에 연재된 글들을 동료인 홍명희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는데 5년이나 걸려 1929년 6월에야 겨우 발행한 난산의 책이었다. 그러나 저자인 단재 본인은 이 책의 발간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홍명희의 『조선사연구초』 서문을 읽어보면 언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異域에 飄泊하는 단재의 一點 血肉 秀凡의 양육비를 보태어 주랴 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수집하여 간행하겠다고 기별하고 출판할 준비를 차렸더니 「평양패수고」에 불만스러운 점이 많으니 다시 수정하겠다는 단재의 편지가 왔었다. 그 뒤에 온 편지에는 한 발 더 나아가 출판을 중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있었다. 단재는 자기의 고심 연구한 것을 草하다가 갑자기 없애 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초한 것을 다시 살펴보고 불만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단재에게 권하기를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 하였다.

조인성은『朝鮮史硏究草』에 나오는 위의 한 구절을 가지고 단재를 천부경 위서론자로 몰고 있는 것이다.
단재가 이 책의 출판을 원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책에 수록된「평양패수고」 「前後三韓考」「朝鮮歷史上 1千年來 第1事件」 등이 모두 미완성의 초고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출판을 주선한 홍명희는 단재의 어린 아들 수범의 양육비를 대어주어야 하겠다는 일념과 단재의 귀중한 글을 썩힐 것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출판을 강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재 본인은 출판을 반대하였다. 단재로서는 고쳐야 할 데가 많은 글들을 이대로 책으로 내어 버린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재는 그 뒤 틈틈이 써놓았던 초고에 推敲에 퇴고를 거듭하여 1931년 마침내『朝鮮史』와 『朝鮮上古文化史』를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 사이에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사건으로 여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의 연호가 박힌 조선일보에 내 글을 싣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단재구를 아꼈던 안재홍(조선일보 사장)은 기어이 단재의 글을 신문에 싣고 말았다. 『조선상고문화사』는 이렇게 해서 나온 글이지만 여기서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문헌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다

我國은 고대에 珍書를 焚棄한 때 (이조태종의 분서 같은) 는 있었으나 僞書를 造作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31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 我國의 서적은 각 성씨의 족보 중 그 祖先의 역사를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眞僞의 辨別에 애쓸 것이 없는 것이다. 위서 많기로는 지나(중국)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가운데 부분 “근일에 와서 『천부경』『31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를 빼고 읽어야 문맥이 통한다. 이 글의 요지는 우리나라에 위서가 없었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인성 한영우 등 위서론자들은 이 글을 반대로 일고 있는 것이다. .
단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통렬히 비판한 분으로 유명하다. 앞의 예문에도 나오지만 단재는 조선사를 연구하며 쓴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중국의 문헌자료만 존중하고 우리나라 문헌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위의 인용문을 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문헌에는 위서가 없으니 우리 문헌을 존중하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단재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선교라 보았고 대종교 창립 이전에 이미 『독사신론』을 썼다. 도대체 선교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조선문화사』를 쓸 필요가 없었다. 앞에 나온 조선상고사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김부식이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그 附庸이다)를 지었으니 그러기에 남북 부여를 빼고 朝鮮 文化의 所出處를 塵土에 묻으며 渤海를 버리고 삼국 이래 結晶된 문명을 草芥에 던졌다.

권근이 비판한 말을 되풀이 하듯 삼국사기를 비판하였다. 상고사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버린다는 것이다.

2)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단재가 가장 칭찬해 마지않은 문헌은 18세기의 인물 修山 李種徽(1731-1797)의 『東史』였다. 단재에 따르면『東史』(1780)에서 이종휘는 조선을 東夏라 명명하였고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위만)을 外紀 아닌 本紀로 삼았다. 조선에 처음 桓國이 있었다고 했으며 환국과 환웅시대에는 우리 고유의 종교인 신교가 있었으니 즉 神으로서 종교를 삼은 것(以神設敎)이라 하였다. 즉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에 강림하여 환인의 가르침인 神敎를 창설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마니산 참성단의 제천, 태백산의 단군사, 구월산(아사달)의 삼성사, 부여의 곤연사鯤淵祀 고구려의 東盟(10월 제천) 隧神祀, 仙人 등과 신라의 神山信仰을 모두 환국에 기원한다고 주장한 것을 단재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이종휘의 단군신교 사상이 대종교에 영향을 준 것인데 단재는 대종교 이전에 단군신앙을 중시한 역사사상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단재는 이러한 관점에서 김부식을 비롯한 조선의 역대 역사가들은 모두 奴隸思想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 일연 역시 단군 이래 조선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부정하였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단재가 『고려사』에 나오는 『신지비사』기록을 특별히 높이 평가하였다. 신지비사에 대해서는 『조선상고문화사』 제2편 檀君朝의 業績과 功德 제3장 神誌의 歷史와 預言에 실려 있다. 단재에 의하면 신지는 단군시대의 인물이며 그의 비사는 책명이자 동시에 그의 이름이라 하였다. 고려사에는 어쩌다 그 중 일부가 기록되었으니 모두 10구로 된 신지비사는 본지 양자로 기록되었던 것을 삼국시대에 와서 고흥과 이문진 같은 사가가 이를 한자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사에 남은 신지비사 10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글은 아래의 2句이다.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머리와 꼬리가 고루 평등하면 나라가 흥하고 세계가 평화 로울 것이다.

단재는 이 글이 고려시대까지 남은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 글이 조선 초 태종(세조의 잘 못)에 의해 왕실에 거두어짐으로서 민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 연유를 상술하고 있다. 단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홍익인간이란 넉자에만 매달리지 말고 다른 자료를 찾아보라고 충고한 것이다. 그래서 단재는 신지가 『神誌秘詞』 이외에도 『震檀九變圖』와 『朝鮮秘錄』을 지어 남겼는데 이 책은 세종대에 편찬된『용비어천가』에도 인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세종이 신지비사를 읽고 고려의 멸망을 예언하고 이성계의 得國을 점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으나 “李氏五百年”(이씨 조선은 5백년밖에 못 간다는 말)이라 한 것을 싫어하여 무학과 하륜을 시켜 漢陽八千歲說을 짓게 하고『진단구변도』를 없애버렸다고 주장하였다.
이밖에도 단재는 최치원이 증언한 『仙史』를 인정하였고 선도에 관한 문헌이 새로 나타나기를 목을 빼고 고대하였다. 그리고 비록 후대에 나타난 사료라 하더라도 類證 互證 追證 反證 辨證 등의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상고사와 선도의 실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그는 심지어 그렇지 않는 연구는 연구가 아니라고 혹평하였다. 기왕에 史의 기록만 있고 史의 연구가 없었다. 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과 같이 단재가 왜 우리나라에 남은 선도관련 문헌에 위서가 없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단재의 상고사 연구는 안타깝게도 광복 후 국사학계에 계승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만 들기로 한다. 『진단학보』는 두계 이병도가 간행한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역사 학술지였다. 광복 후 대학 강단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진단학보에 논문을 실어야 국사학자로 인정받았다 할 정도로 아무나 범접하지 못하는 학술지였다. 이병도 선생 하면 해방 후 국사학계를 무단통치 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권위자였다. 필자는 아직도 진단학보에 논문을 싣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다. 진단이란 이름부터가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를 대변한 나라 이름이었으니 단군과 선도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을 법도 한데 하나도 없다.
이름을 진단학보라 짓고 일본인들의 靑丘學報와 맞섰으니 나라와 겨레를 위해 외적과 역사전쟁을 벌인 학술지같이 느끼지만 『청구학보』에 실린 일본인 논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병도 선생이 진단학보 발간사를 쓰면서 1930년 그 당시에 『신지비사』이본이 하나도 아닌 3종이나 있다고 한 사실을 알고 있다. 후일 필자가 선생에게 물어 보았으나 잊어버렸다고 한 사실을 기억한다.
아직까지『진단학보』에 『신지비사』와 『규원사화』를 인용하면서 쓴 연구논문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진단학보의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여타의 다른 학보에도 상고사와 선도에 관련하는 논문이 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5. 북한의 단군릉 발굴

우리는 여기서 북한의 상고사 연구현황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북한에서의 단군 내지연구는 이지린의 『고조선연구』(1962)에서 시작된다. 남한에서 월북한 백남훈은 정인보와 같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문해석에 도움을 받았으나 단군을 귀신이라 하면서 부정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지린은 자신의 고조선연구에서 일제식민사학자와 남한의 부르죠아 역사가들 그리고 남한에서 월북한 백남운도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백남운 선생은 조선에서 계급국가 형성을 고구려에서부터라고 인정하고 삼한 부여 예맥 등을 원시부족국가라고 안정하였으며 고조선을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사실로 보아서 그는 단군 신화를 원시부족국가 형성시기에 조작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고조선의 국가 형성을 고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될 수 없다. 필자는 고조선의 국가 형성 시기를 추단함에 있어서 고조선의 보다 늦은 시기로부터 시대를 소급해 가면서 간접적인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을 맹공하였다.

일본 부르죠아 역사가들은 처음부터 고조선을 조선고대사로 인정하지 않았고 고조선연구를 더욱 흐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지린은 단재가 강조하였던 우리의 선도문헌을 읽지 못하고 중국문헌만 가지고 고조선의 강역을 고증하였다.

고조선이 어느 때 국가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논단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이처럼 이지린은 문헌 자료의 결핍을 호소하면서 “부르죠아 역사가들이 우리나라 고대사회가 마치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선전하였으며 선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중국 봉건 사가들의 곡필로 꾸며진 사료들에도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글자 한자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말살되고 남은 사료에 근거하더라도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은 결코 초기적인 노예소유자 국가가 아니며 아세아적 고대국가로서는 이미 낡은 국가로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1993년의 大朴山 단군릉 발굴(1993년 10월) 이후 북한의 단군 연구는 180도 회전하여 남한 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역시 한동안 묵살 반대를 하다가 서서히 검토하게 되었다. 북한학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규원사화를 문헌자료로 인정하고 환웅시대까지 한국사의 상한선이 거슬러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고기 단군고기 단군 본기 등 옛 기록들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군이 처음으로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三國遺事 권 1 기이 2 古朝鮮條에 인용된 고기의 기사에는 고조선 국가성립의 전제가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 때 확고히 마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신화로 엮어진 환웅기사에는 원시사회 말기 국가발생 전야의 사회상이 생동하게 반영되어 있다.
환웅시대는 아직 원시적 민주제에 기초를 둔 것이기 때문에 계급적 대립과 투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북애자의 『규원사화』를 비롯한 역사기록들에 의하면 단군은 이러한 원시적인 지배기구를 소수의 특권층 이익을 위한 기구로 개편하였다.

또 다른 몇 학자는 지금까지 무시하여 온 모든 자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종래 대다수 역사가들이 위서로 인정해온 규원사화 단기고사 단군세기 태백일사 등 비사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들에 단군조선의 역사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문헌학적인 고증이 없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인용해도 안 되지만 근세에 윤색 첨가된 내용이 적지 않다고 하여 덮어놓고 무시해버려도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비사들은 저자와 편찬경위가 분명치 못하고 내용에서 민족주의적 감정에 의하여 가공된 흔적이 적지 않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구전이나 기록으로 항간에 전해 내려온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조대기』나 『진역유기』 등 저본들에 일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시기에 왜곡되었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모든 자료와 견해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바로잡을 때만이 우리는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세기 후반기 이래로 국가적인 금지도서였던 『삼성기』라는 책에서는 단군 때에 신전(神篆 신지전자 신지글자)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16세기 초의 학자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유사』라고라고도 함)에서는 단군 때 신지篆書(神誌篆字 신지글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천구(조선), 구려 등지에서 널리 썼다고 하였다.

부루단지 삼신주머니 풍습에 대하여 17세기의 기록 규원사화에 단군 때의 유습으로 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북한에서는 처음 백남훈의 주장대로 단군을 인정하지 않다가 김일성의 유시에 따라 단군릉을 발굴한 1993년 이후 급격이 단군조선 평양정도설을 주장하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사서 등 전통적이 정사류 문헌 이외에 환단고기 규원사화를 일제히 인용하기 시작하였다.

5. 매는 말

1980년대 재야 사학자 이유립이 편찬한 『환단고기』가 공개되기까지 아니 그 후에도 여전히 우리 국사학계는 이른바 재야사서를 인용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식민사학의 영향 하에서 한국사학계가 자라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사학계의 이 같은 정황은 비단 사학계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계에 영향을 미쳐 중대한 정체현상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철학과 종교 민속학 고고학 등 일부 인문분야에서 상고사 연구가 진행되어 그나마 숨통을 트게 하고 있고 비록 학문외적인 배경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북한에서도 상고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위서론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선도문헌사료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연구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문헌자료로 꼽히는 사기와 유사 속에도 재검토할 부분이 많다. 이런 재검토 작업이 꾸준히 진행될 때 위서 진서논쟁은 잠들 것이다. 예부터 “책을 맹신하는 것은 책이 없는 것과 같다”(盡信書 如無書)는 말이 있다. 어떤 책도 맹신하여 백독 천독 만독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책속에는 거짓이 있고 참말이 있게 마련이다. 공자는 고의적으로 빠뜨리고 빼는 것을 정당하다고 했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문서가 아닌 사서인 이상 아니 文書라 하드래도 史書는 역사적 현실과 다른 것이다. 그런 책들을 가지고 말 한 마디 틀린 데가 있다하여 책 전체를 위서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가장 위험한 생각은 1910년 이후에 나온 책을 모조리 위서라고 단정하는 태도이다. 1911년에 나오면 어떻고 광복 후에 나오면 어떤가. 고려시대에 나온 책이라 하여 옳고 조선시대에 나온 책이라 하여 증거능력에 우열을 먹일 수 없는 것이다.
대종교 책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위서라고 하는 학계의 불문률은 분명 일제식민주의 학자들의 농간이 그 원인이었다. 단군은 인정하지만 환웅 환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금지한다는 것은 조선왕조 건국초부저의 국책이었다. 문제는 단군의 실존 여부와 47대(규원사화 환단고기)냐 42대냐(영번지)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단군 이전의 환웅시대를 인정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규원사화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고려 시대에 聖帝祠가 있었고 요나라 木葉産에 三神廟가 있었고 금나라에도 開天弘聖帝의 묘가 있었다. 우리나라 세종은 평양에 檀君廟를 세웠고 세조 원년에는 위판을 고쳐 朝鮮始祖 檀君의 廟라 하였다. 그래서 무릇 신시(환웅)의 일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이를 의심하였다. 지금까지도 오직 단군만 숭배할 줄 알고 그 이전에 신시씨(환웅)가 개창한 사실을 모른다. 세속에 기원을 모르고 오직 한적에만 의존하여 선교를 黃老(황제와 노자 즉 중국)의 餘流라 하면서 神敎의 기원이 神市(환웅)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논문요지 】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와 선도문화에 대한 기본사료로 사용된 것은 본시 이승휴의 제왕운기였으나 일제강점 이후 일연의 삼국유사로 바뀌었다. 삼국유사에는 古記를 인용하면서 웅녀가 단군을 낳았다고 사실을 신화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本紀를 인용하면서 단군의 어머니는 환웅의 손녀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고기 운운하였으나 본기 운운한 적은 없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조선이라 한 뒤 단군을 곰의 자식이라 한 삼국유사를 불온문서로 보았을 뿐(시종대왕) 아니라 그와 유사하게 기록한 모든 사서를 수거하여 분탕하였다.(세조) 조서왕조는 단군을 동방 최초의 건국자로 정한 뒤 줄곧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정론으로 삼았으며 단군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을 공인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동몽선습을 비롯한 모든 사서에 단군이 동방 최초의 군장으로 기록되었으며 환인과 환웅은 생략되었다. 일제 침략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이런 조선의 國是는 여지 없이 무너지고 단군 이전의 역사 사실을 기록한 秘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변화를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한 단재 신채호는 상고사를 복원하고 한국 고유의 선교문화를 강조하였다. 일제는 신채호와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의 역사 저항을 두려워하여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단군말살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조선사의 상한선은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으로 단축되고 그 이전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사실상 역사 연구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전통을 계승하여 단기 연호를 썼으나 1961년 이후로는 서기로 바꾸었고 규원사화 환단고기가 출간되었다고 하나 문교당국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국사학계는 처음 냉담하다가 후에는 위서론을 가지고 선도문헌을 백안시하였다. 그러나 천부경과 삼일신고 규원사화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다. 의문시 되는 부분도 보아야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부분도 함께 보고 위서론을 극복하는 일이 급선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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